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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서스 11-2) 이야기

오늘은 넥서스 이야기 편에 대한 글을 쓴다.

호모데우스에서 열심히 들었던 내용이지만, 다시 복기 차원에서 넥서스에도 관련 내용을 넣었다.

 

지금 우리 인간 사회는 모두 이야기가 만들었다는 세계관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사회적 인간이라 규정하는 민족 정체성, 종교, 국가와 같은 관념들이 모두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이야기가 허구인지 진실인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고, 함께 협력하며 살게해준 바탕에 바로 이 이야기 사관이 존재한다. 한발 물러서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러하다. 나를 이루고 있는 이 모든 것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이 실체들. 누가 나에게 알려주고, 책을 통해 배우고 학습해서 규정된 나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내가 태어난 그 공동체 안에서 학습하고 내재화된 결과물이다.

 

인간이 이야기로 만들어낸 너와 나의 공감. 이것이 바로 상호주관적 현실이다. 이 현실을 인정하는 자들끼리만 알고있는 현실이다. 무인도에 떨어진 백만장자가 자국돈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그것은 상호주관적 현실이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화폐. 이념. 제도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상호작용으로 만들어낸 제 3세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인간은 상호주관적 현실을 이야기로 만들어냄으로써 동물과 차별화될 수 있었다. 2개의 차원밖에 존재하지 않은 동물에 비해 월등히 상호작용을 하고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협력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 이야기의 진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목적에 더 효과적이었고 쉬웠기 때문이다. 진실을 진실로 입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들 알지 않는가.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 대중을 선동하고, 목표한바를 이루는 것이더 달콤하고 간편하다.

 

그렇게 인류의 역사는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을 계속 거듭했다. 훗날 역사를 바라보는 후대에서는 말도 안되는 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당시 그들이 가진 힘을 제어하지 못했다. 파국에 이를 것이라 예상하면서 그 행동을 하지는 않아겠지만 그들이 믿었던 이야기는 당시 민중에게 설득력이 있었고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힘이었다. 이런 비극적인 실수를 인간은 되풀이 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 힘을 이용하려는 이야기꾼들에 의해 세뇌당했다.

 

우리가 절대선이라고 여기는 성경과 헌법도 사실은 마찬가지이다. 성경도 2000년전 누군가에 의해 정리된 신의 계시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절대 하나도 번복하지 않고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산다. 그렇기에 타인을 공격할 수단도 되고 삶을 짓밟을 수 있는 근거도 된다. 인간이 만들어낸 헌법도 분명 오류가능성이 존재한다. 당시 헌법을 만들었을 때는 당연한 믿음이었고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겠지만, 시대가 변하고 이야기가 변하다 보면 당연히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그 해석이 필요하고 그것이 권위있는 재판관들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2000년전 이야기이며 고칠수 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헌법은 다르다. 그래서 헌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늘 계속된다. 그 문서쪼가리 안에 들어있는 문구 하나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결국 인간의 삶과 그 결정들이 누군가가 별 생각없이 만들었을 수 있는 그 종이 쪼가리 안에 문구 하나로 바뀐다. 이런데도 이야기가 만들어낸 인간의 네트워크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권위주의 국가는 이러한 도전을 권력에의 도전으로 여기고 처참히 짓밟는다.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거나, 주변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그들의 눈과 귀는 오직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서 사용된다. 민중들이 듣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과거 마르크스 주의는 세계를 객관적 물질의 이해관계의 의존한다고 보았다. 즉 위에서 언급한 상호주관적 현실을 모두 부정했다. 종교.이념.체제.민족 이 모든것이 불필요한 이유이다. 오직 노동자와 권력자와의 관계. 우리가 정확히인지하는 객관적 현실만이 모든것의 근간이라고 본 입장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리도 치열하게 우상숭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없애려고 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이렇게 단순하게 계급으로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야기를 부정하면 그 사람의 정체성 마저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마르크스 주의는 실패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도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결국, 인간을 움직이는 힘인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온 근간이며 추동력이였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그의 사관에 들어와서 생각을 하다 보면, 정말 어쩜 이리도 명쾌하게 분석을 해놓을 수 있었는지 감탄을 할때가 많다. 나의 생각과 결을 같이 하고 내 생각의 기반이 되는 그의 명석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전세계 반 이상의 사람들은 그를 부정하리라 본다. 그들이 믿고 있는 많은 부분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나만의 생각을 또렷이 갖고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정말 추천한다.

 

너무많은 진실과 정보가 난무해 혼란스러운 현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진실과 정보없이도 그저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 수있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일까. 진실을 탐구할 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2025년의 대한민국이다.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깨어났다. 사회가 양분화되었다. 각자자신이 믿는 이야기를 더 강화시킨다. 그들은 변한 것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현정부에게 힘을 실어준 국민이 다시 계몽되었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가까운 가족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전한길 선생이 성공했다. 진실을 이야기로 호소력 있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도 듣고 있으면, 과장과 선동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진실만으로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가 적절히 선택한 수사학적 설득, 호소력, 그리고 팩트에 기반해 이야기로 풀어낸 그 능력에 사람들은 압도 당한 것이다.

 

그동안 아무리 많은 보수 연사가 외쳤어도 먹히지 않았던 호소가, 그의 입을 통해 이렇게 전파된 것에는 1타강사라는 자질이 아마 한몫햇지 않았나 싶다. 똑같은 이야기도 사람들에게 와서 팍팍 각인되도록 핵심어를 진정한 호소와 함께 전달 한 것.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