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결핍이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
결핍은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준다. 특히, 어렸을 적의 결핍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상하리만큼 특정한 것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니 왜 저래? 저게 뭐라고? 라고 우리는 흔히 반응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반응에는 그들의 무의식적인 결핍이 숨어있다. 어렸을 때 돈이 없었던 사람들은 지독하리만큼 돈에 과민반응을 보인다. 또, 부모의 애정이 없었던 사람은 그 애정을 갈구 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만 또 결과는 똑같다.
그렇다고 결핍이 없는 상황이 좋은 것일까? 그것 역시 회의적이다. 결핍이 없으면, 소중함을 모른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소중함을 모른다. 부모가 모든 결핍을 채워주며 자란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이 너무 당연해서 부모에게 감사해 할 줄 모른다. 그저 자신이 잘나서 이 모든 것을 이룬것 마냥 생각한다. 오히려, 어렵게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부모님께 꼭 효도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지 않는가? 풍족하게 자라며 누릴 것을 다 누린 아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집이 많았던가? 꼭 그렇지 않다.
그러다보니, 재벌집의 아이들 상당수가 마약에 빠지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 부족한점이 없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도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부모가 짜주는 대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무기력함에 봉착했다. 그런데 여기서 갈림길에 서는 결정적 차이가 바로 부모의 애정과 관심이다. 부자이며, 정해진 길이 있는 그 훌륭한 아이들이 모나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간 대다수는 훌륭한 엄마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인간은, 특히 어린아이는 절대적인 사랑을 받아야 한다. 나만 바라보고, 나만 위해주는 내 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재벌집 아이들은 그러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아이들을 봐주는 보모가 있고, 정서적인 유대감은 엄마보다 보모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초등학생이 되면서도 부모의 관심과 정서적인 케어보다는, 해야하는 것과 할 일만 앞에 놓여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자신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렇게 부모와 소통을 줄이게 되었을 것이다. 이후, 부모와의 관계에서 상호 피드백이 없었고 자신이 온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애정 결핍에 놓이게 된다. 이는 특히, 홀로 떨어져서 조기유학을 갔던 자녀들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 대부분은 마음을 터놓고 고민을 나눌 대상이 부모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부모와는 멀어져 버리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재미를 잃고 만다. 돈도 많으니 목표도 없고, 그저 단기간 도파민을 얻을 수 있는 행동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재벌집 자식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아주 가난한 집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가난한집 어린이는 부모가 생계를 이어가는데 바빠, 자식은 알아서 커주기를 기대하고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부모와 소통은 거의 없었을 것이며 돈과 애정 모두 결핍 상태에 빠진다. 외로움을 나누고, 관심을 공유할 대상도 없는 이 아이들 역시 나쁜 길로 빠지게 된다. 그 중 가장 문제는, 새로운 애정을 주는 나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다. 처음에는 처음 받아본 애정과 관심에 몸둘 바를 모르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긴다. 이내 그 사랑은 불꽃처럼 타올라,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사랑하는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다시 그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그 사랑은 그저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닌 관심과 애정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세상의 전부며, 인생을 바꿀만한 혁신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쁜 사람과 결혼하며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이 어린시절 받지 못한 결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인생에 영향을 준다. 어린시절 할머니와 자란 나는,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정말 컸다. 엄마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더 많은 교류를 했기 때문에 할머니가 곧 엄마였다. 커서 할머니에게 효도해야지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는데, 나름 최선을 다해서 효도하고 보내드렸던 것 같다. 그래서 사실 후회가 남지 않았다. 그 시절 나에게 결핍은 없었다. 사실 지금도 이렇게 무난하게, 무탈하게 살고 있는 나는 결핍없이 잘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바쁘셨지만 부족함이 없이 지원해주셨고, 할머니의 훌륭한 양육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의 형제자매는 다른것 같다. 일단 태어난지 얼마안되서 동생이 생긴 나의 누이는 인생이 결핍 그 자체다. 공부를 상당히 잘했으면서도, 어린시절 엄마를 뺏긴 것 때문인지 평생 돌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 결핍이 평생을 그녀인생을 지배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보다 잘난자와 자신을 비교했고, 괴로워했다. 부모님이 주시는 지원이 적지 않았음에도 늘 더 가진자와 자신만을 비교하며 불행했다. 늘 공부를 잘하는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며, 상대. 그리고 부모님을 무시하기는 기본이었다 보니 자신보다 잘난자를 본 그 자괴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런 그녀는 애정을 바랬는지도 모른다.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그런 사람을 찾았는지 모른다. 어린시절의 나도, 그런 애정 결핍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긴 했는데 그 때를 생각해보면 아직도 끔찍 그 자체다. 그저 누군가 나의 일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는 그런 정서적 안정이 필요했나보다. 아니 어쩌면 외로웠나보다. 내 일상을 공유하고 생각을 얘기하고, 사랑을 갈구 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나보다.
나의 동생 마저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을 찾아갔다. 편히 기댈 수 있는 정서적인 안정을 주는 존재에게로. 결국 우리 세명 모두에게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지 못한 결핍이 있었다. 어찌보면 별거 아닌 사람이 주는 그 사랑에 감동받는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물론 지금의 나는 아니다.) 그리고 그 시절 그 결핍은 지금도 이어진다. 부모에게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되돌려줄줄도 모른다. 부모에게 받을 것은 다 받았지만 그건 온전히 내가 잘해서이고, 내가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은 없다고 생각하나보다. 여전히 자기들밖에 알지 못한다.
만약, 그시절 부모님이 우리를 할머니께 온전히 맡기지 않고, 우리의 정서적인 유대를 더강화했다면 지금은 조금 달라졌을까? 부모님과 더 친밀해질 수 있었을까? 그들의 희생에 고마워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선택의 순간에서 배우자의 조건을 나의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상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지금 더 많이 연락하고, 늘 감사해하며 효도하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
참 어렵다. 결핍을 주지 않으면서, 또 모든 것을 다 채워주지 않는 것이말이다. 하지만, 단 한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을 듯 하다. 너무 채우려고 해서도 안되고, 너무 비워서도 안되는 것. 많이 싸워야 더 단단해지듯 더 많이 부딪치고 일상을 공유해야 그 관계가 친밀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육아는 쉬워서는 안된다. 더 많이 함께하고, 애정을 쏟아야 하는 대상이 바로 자녀이다. 더 현명하게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