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의 끝판왕인 연역법에 대한 이야기,
그만큼 내용도 많고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몇번을 다시 읽었다.
학창시절 연역법에 대해 잠깐 공부했을 때도,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A가 B, B가 C,고로 A는 C이다..라는 명쾌한 필연적인 연역방법이었으나, 그것이 정말 이야? 라는 의구심을 논리적으로 해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독서를 통해 정확히 알게 되었다.
논리학은 논증을 통해 거부하지 못한 설득력을 얻고자 하는 학문이며, 특히 이를 현실세계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자연언어와 연관 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자연언어에 적용되는 논증 법칙을 찾기 위해 수천년을 고민했다. 우리가 말하는 일상생활의 모든 사고과정을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매우 놀랍다. 그 공식에 대입하면 어떤 명제도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할 수 있으며,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뒷받침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직까지 그런 방법은 발견되지 않았다. 연역법의 대가인 비트겐 슈타인 조차 그 정답을 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참이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은 그간 형식적 측면에 치중하다 보니 우리의 복잡한 언어를 아주 단순화해서 형식화하는데만 많은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 시도가 모두 실패한 것을 보면 이제 논리학은 단순함을 추구하기 보다 논리적 영역을 좀더 우리 자연언어에 맞추어 더욱 복잡하게 확장 시킬 필요가 있다.
과거 그리스시대 부터 이어진 논리학 중 가장 대세를 차지한 분야가 형식논리학이다. 논증의 타당성만을 중시하는 방법인데 형식적으로 올바른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내용이 거짓일지라 할지라도 형식적으로 맞다면 ㄴ형식놀리학의 일부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가추법과 같이 형식적인 부분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내용이 참이라고 할지라도 제외시킨다. 이러한 형식논증의 대표주자가 바로 연역법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삼단 논법이라고도 하는 방법이다. 이 연역논증은 누차 강조했든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온다. 이는 벤다이어 그램을 그려보면 매우 쉽게 이해가된다.
큰원 A
중간원 B
작은원 C가 있다.
C는 B에 속해있고 B는 A에 속해있으면 C가 A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필연적으로 참이다. 이것이 바로 그렇게 어렵게 생각했던 연역논증이었다. C가 참이라면 A는 반드시 참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증의 설득력을 논할때는 반론의 여지가 없으나,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역 논증이 논리학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데는 과거 소크라테스때부터 이어오던 노력들의 결과여서가 아닐까. 과거 그리스시대 사람들은 개념을 정의하는 일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남자라는 개념자체부터가 모호하면 모든 전제가 거짓이 될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개념에 대한 정의를 산파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상식에 속하는 개념을 고르고 거짓이 될 수 있는 예를 찾아낸다. 그리고 잘못된 상식을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정의를 고쳐나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윤리적으로 마땅한 정의를 찾는데는 성공할 수 있으나,논리적인 정의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필요한 부분들은 모두 제거할 수능 없었기 때문이다. 과정이 중요한 윤리와 결과가 중요한 논리의 차이였다.
이를 더욱 계승 발전 시킨 것은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세계와 사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연구하고자 했다. 따라서 모든 개념은 존재들간의 관계로 이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르거나 동일하다"를 발전시켜
존재하는 것은 생물이거나 생물이 아니다, 생물인 것은 동물이거나 동물이 아니다. 동물인것은 인간이거나 인간이 아니다. 와 같이 존재하는 것과 부정으로 그 분류를 나누었다. 그 결과 가장 하단부에 있는 인간은 동물이다와 같은 구분은 필연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자연언어의 논증화 부분도 꽤 인상깊었다.
이부분은 오늘 힘이 없어 내일 이어가야겠다.
논리학이 이토록 재미있을 수가.
정말 잘 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