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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일차, 호모데우스 6 근대의 계약

근대 이후 인간은 끊임없는 경제 성장을 통해 힘을 키웠다.

 

근대계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이 힘을 가지는 동시에 의미를 포기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언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인간은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끊임없이 힘을 키워왔고 그로 인해, 어떤 현상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을 포기하였다. 특히, 과거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모든 의식들이 없어졌고 또 신의 이름으로 벌하던 모든 자연현상들을 과학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현상에 대해 목적을 찾기 보다, 그에 대한 원인을 찾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이렇게 끊임없이 인간의 힘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과거에는 어떤 한 집단이 더 많이 가진 다는 것은, 다른 집단이 적게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 근대의 경제성장은 사람들의 파이 자체를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신용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며, 미래의 생산력, 발전 가능성에 대한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당장보다는 미래의 발전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전제가, 인간의 파이를 키워 모두가 잘 살게 되면 모든이의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 아니었던가. 그랬다. 자본주의하에서는 가난한 사람들도 근대 이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되었는데, 이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 조차도 목표는 경제 성장이었다. 다만, 경제성장의 부작용을 국가가 해결해준다는 것이었지 경제 성장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오늘날의 근대 이후 세계는 경제 성장이 만병 통치약이 되었다. 과거 종교가 죽으면 천국에 갈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던 반면, 경제성장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는 지금 너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해준다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투자하고, 삶을 더 좋게 만들라고 얘기하고 있다. 우리의 자연이 파괴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신경쓸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당장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과 몇십년 후에 닥칠 환경 재앙 사이에서 현실의 경제성장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차례 기후 협약이 발표되었지만 그 목표는 모두 몇십년 이후이며, 당장 힘든 시간을 견디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늘 그래왔든 역사에서 급격한 변화의 희생양은 가난한 사람들이지, 부유한 계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생태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또 지식을 결합해 새로운 형태의 발전을 도모 하고 있다. 노아의 방주 처럼, 훗날 생태계 파괴로 인해 지구에 인간이 살지 못하게 될때를 대비해 새로운 주거형태를 만든다던가, 화성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이우리를 구원하게 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인간은 지구상에 있는 영토, 그리고 자원을 거의 모두 소진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는 것은 곧 다시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에, 모든 국가는 경쟁적으로 신사업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물리적 제약을 받지 않고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켰다. 실제 세계에서는 아무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 공간이지만, 전세계인들이 이 공간에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놀랍지 않은가. 또, 이제는 어떤 형태로 인간의 삶이 새로운 지식과 공간과 결합해 바뀌어 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현대 모든 국가는 경제성장을 통해 힘을 도모한다. 정치체제에 상관없이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윤택한 삶을 제공해야 한다. 모든이가 빈자의 삶보다는 부자의 삶을 원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이익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경제적 성장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달라진다. 자본주의가 이런 탐욕과 이기심에 대해서 철저히 경제 성장이라는 논리로 정당화 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도 정말 경제성장을 절대 선으로 규정했을까? 공산주의의 목표도 어찌 보면 모두가 똑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으니, 일견 타당한 의견이다. 저 가까이 북한도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해 늘 주민들이 고통스럽고, 이탈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마 모두가 잘 사는 나라였다면 저렇게 공포통치를 하지 않아도 만족하며 살아가고 잇겠지. 중국도 사회주의를 벗어나서 시장경제를 택했던 것은, 결국 경제성장이 없으면 사회 이념 조차 지키지 못한다는 절박함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결국, 탈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어떤 신기술이 결합되어야만 더 가능해 질것인가?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그들에게는 통제의 대상이다. 대체 무엇이 더 있어야만 저들은 진정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인가? 또한, 과거 종교의 역할이 그랬던 것처럼. 위대한 수령만 믿으면 모든것이 해결된다는 그 믿음을 깨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그 많은 일들이 과학으로 가능함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주장따위는 믿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저들 국민들 속에 남아있는 사고는, 신(=김 주석)이 정해논 틀을 벗어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일이며, 전지전능한 그분의 말씀을 죽어서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마치 200년전, 아니 500년전 사람들의 사고와 같지 않는가? 

 

아무리 우리가 근대의 계약을 통해 힘을 갖게 되었다고 한들, 신처럼 행동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들이 전단을 두려워하고, 격노하는 이유도 세상에 대한 진실을 하나둘 씩 알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미 정해진 각본에 따라 순응하는 삶이 그들이 만들어 낸 세계이지만, 그들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장에서 말한 허구에 실재를 적용시켜, 인간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나라가 바로 북한 아닌가. 

유훈이라는 말장난으로 사람에게 지켜야 할 윤리적 가치를 제시하고, 사실적 진술을 왜곡시켜 지침을 만들어 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고 장난치는 나라.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저 가까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