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일차,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인생의 목표를 ..찾으라더니 오늘 20강. 의미에서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한다.
아직 잘 정리가 되지 않아서 글을 쓰면서 의미를 다시한번 새겨보려고 한다.
20강 소주제는 의미이다.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
앞장에서 계속 강조해왔듯, 우리 인간이 힘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허구를 믿기 때문이었다. 그 허구를 만든 힘이 바로 "이야기"였다. 크게 볼 필요도 없이, 우리 인간이 가진 내적 스토리 역시 실체가 없는 허구라는 결론이다. 내면을 탐구하고 바라보고, 직시하는 모든 행동 역시 자유주의가 만든 허상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의미있는 인생을 살아라. 와 같은 이야기 역시 말이다. 자유주의가 힘을 키운 모토는 "내가 가장 잘 안다. 내가 늘 옳다"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대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고 만들어진 이야기 일뿐이다. 정말 그것이 맞는지 생각해보고, 찾아보고, 의심해 본적이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진짜라는 진실을 실제로 확인하였는가? 내가 믿고 있는 종교, 국가, 민족, 역사 역시 모두 의심해볼만한 대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정말 진실인지.
종교적 세계관에서는 사람들이 태어난 이유가 어떤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의미를 갖고 태어났다고 한다. 모든 탄생에는 의미가 있으니 그대로 살면 세계를 순환하는 궤를 같이 할 수있을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라도 기여하고 싶어한다. 내 행동을 더 의미있게 하고 싶어, 내가 하는 모든 사소한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큰일에 기여함으로써 내 존재를 더 빛내고 싶어한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 우리 국가를 위해, 전 인류를 위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행위에서 인생을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
사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1년반정도동안 내 가장 큰 고민이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의미있는 인생을 살 것인가 였다. 목표가 없는 삶은 목적지가 없는 삶이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다보면 인생을 잘 살수 없다는 이야기이도 했다. 그래서 나는 사실 필사적으로 나에게 물었다. 넌 대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니, 니가 세계를 위해 기여할 수있는 일은 무엇이니.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답을 찾지 못하였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목표도 그닥 위대해보이지 않았고 나는 하고 싶지 않은 목표들이었다. 나만이 인생을 의미있게 빛낼 수 있는 일이 대체 무엇인가. 그런게 있기는 한걸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뚜렷한 인생 목표를 정하고 살고 있지는 않는다. 닥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편이 더 낫다는 사람들도 많다. 아둥바둥 살다보면 더 큰 무언가를 놓치게 될거라고 경고한다. 그저 순리를 따르며 놔두라고도 한다. 대체 무엇이 맞는것인지 아직도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이 그렇게 틀리지 만은 않았구나 하며 한편은 안도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꿈인 "세상을 더 좋게 만들자"라는 이 생각조차, 내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데 그럼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나요? 라는 답변을 하지 못하게 한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자라는 것조차 내게 또는 전 지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후대를 위한 좋은 선택을 한다? 그것이 나의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일까?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내 자아는 사실 허구적이다. 인스타에서 보이는 나와 실제 나의 삶은 같은가? 나는 두개 자아를 각기 다르게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되고 싶은 자아와 현실속 자아를 분리하면서 나는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가? 나는 많은 일들을 경험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모두 가질수도 없다. 내 경험을 합칠 수도 없다. 인간의 느낌도 의미가 없다. 지금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그럼에도 억지로 인생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우리밖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 또 우리 몸안도 통제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내부와 외부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몸과 마음의 실제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아무런 개입없이도 우리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스스로 생겼다 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떤 생각은 그저 이유없이 떠올랐다가 또 사라진다는 사실 말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우침과 매우 유사하다. 우주는 의미가 없고, 인간이 느끼는 바도 의미가 없다. 그저 특별한 목적없이 나타났다 사라질뿐이다.
몇천년전 불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우리 내면을 끊임없이 성찰해서 답을 찾으라는 답변 역시 틀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것은 끊임없이 변하기에 지속적인 본질은 없다. 따라서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도 없다. 우리는 절대 완벽한 상태를 이룰 수 없다. 고통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 사실을 부인해서 내가 가지지 못한 바와 이루지 못한 것들을 끊임없이 괴로워하며 시작된다. 생에는 의미가 없다. 그 의미를 애써 만들 필요가 없다.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집착과 공허함을 버려야 한다. 그럼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말이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는데 있다.
우리의 의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실체는 존재한다. 우리가 인간으로써 살고 있다는 그 사실 말이다. 우리가 아는 종교,민족, 이데올로기는 고통을 느낄수 없다. 하지만 그에 속한 개인은 그 고통을 경험한다. 우리는 앞으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느냐로. 의미를 찾는 이야기를 찾는 것보다 고통을 느끼는 주변을 바라보며 우리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먼저 고통을 찾아라.
매우 심오한 이야기이다. 세상 모든 이치를 깨달은 승려가 열반에 드는 것은 바로 더이상 산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기에 무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 바로 매트릭스 넘어 또다른 매트릭스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알수도 없을 뿐이며, 사실 이모든 것이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무념 무상의 상태. 나의 자아에 더이상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말아라. 그저 사니까 사는 것이다. 그저 아둥바둥 살지 말라. 사실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훌륭한 이야기이나, 세계적인 선각자 유발하라리가 이런 결론을 내려고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 21강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어쨋든,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너무 부여하지 말자. 또 좋은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끼는 바가 생기겠지. 정말 이 책은 나의 인생관을 모조리 다 바꿔주는 책이다. 읽고 또 읽고, 매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