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차, 죽음에도 자유가 있을까?
몇일전 가족의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도 소중한 여러명의 아들이자, 배우자이며 아빠였던 그가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가족들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느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가족관계를 지니고 있던 그 아들은, 두 집안의 너무나도 소중한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너무나도 큰 책임감이 주어진 것이었을까, 그는 그에게 주어진 운명과 그 자리가 너무나도 힘들었었던것 같다. 다시한번 이자리를 빌어 추모한다.
하지만, 그의 자유로운 선택 이후에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어떤 고통이 뒤따르고 있을까.
갈기갈기 찢겨지는 고통속에서, 그나마 가족이라고 남아있던 그 관계들이 이제는 찢겨지다 못해
밟히고 채이고, 고통만 남게 되었다.
그에게는 죽을 자유가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선택대로 세상을 등졌지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진 않았을까?
행복할 권리, 살아갈 권리, 의지할 권리, 이 모든것을 박살냈고
남아있는 사람에겐 평생 씻을수 없는 고통만을 남겨주었다.
간자는 말이 없지만, 남은자는 이제 간자의 고통까지 함께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의 선택이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이 세상에 나만 힘든 것은 없는데, 나의 행복? 을 위해 타인을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니...
세상에는 다양한 죽음이 있다. 어떤 죽음도 슬프지 아니할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저버리는 죽음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질 희생과 고통이 너무나 크다.
수많은 자책, 지난날에 대한 후회,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과연 이것이 내가 자유롭게 행동한 것이 맞는가, 죽을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내맘대로 하는 자유만 생각한다면, 충분히 공감받을수 있을까?
이에 반해, 이런 자유를 모두가 원해도 하지 못하는 또하나의 죽음의 선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안락사,
죽음의 자유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 안락사라는 것은 자살을 선택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하고 안락하게 죽고 싶은 마음에서 도입된 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죽을만큼 고통스럽고 힘들다면, 자유의 관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도 있지 않은가.
꼭, 누군가의 힘과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정당화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법의 심판을 받고, 가족의 허락을 구하고, 의사의 부담을 지우는 안락사를 선택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결국, 자유 의지조차도 행사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논의의 초점인 것이었다.
삶이 고통스러운것과 다르게, 병으로 인해 오는 신체적인 고통. 우리도 한번쯤은 아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해본적이 잇지 않았던가. 그 고통을 참으며 잠을 자고, 약을 먹으며 달래다 보면 시간이 흘러 고통도 잦아 든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상황은 다르지 않을까?
유명 연예인도 통증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많은 사람들이 병과 싸우다 스스로 생을 달리 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감히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이 사람들은 죽을 자유를 스스로 선택하고 행한 사람들이라 볼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행복보다, 현실의 고통이 너무 큰 사람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죽을 자유를 선택한다. 남은자의 고통도 말할 것 없지만, 이 때 남아있는 자는 함께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며 망자를 잊고 마음속에 묻으며 살아갈 수 있다. 망자의 선택의 자유를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을테니까..
그럼 전자와 후자는 무엇이 다른가? 갑자기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내가 해줄 수 있는게 분명 있었을텐데, 내가 바꿀수 있었을텐데 와 같은 후회가 남는다. 하지만, 고통속에 몸부림 쳐갔던 사람들의 가족은 자신이 더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음을 안다. 이것은 또 무슨 차이인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꾸지 못하는 것의 차이일까.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바꿀 방법이 없을때는 죽음의 자유도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관점에서 이런 고통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자신의 몸 하나 조차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의 죽음의 자유는 어떻게 논의 해야 하는지 좀더 고민해보도록 하겠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후자의 사례처럼 아무것도 더이상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사람의 죽고싶은 의지는 확인 할 수가 없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는게 더 나을것 같지만 말을 할수도 없다. 아니면, 너무 살고 싶은데 살릴 수 있는 방법을 현대 의학은 찾지 못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보통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택한다.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소중한 가족을 잃을 수없어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은 오랜 간병에 지치고,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된다. 그러면서 그 간절했던 소망도 점차 작아진다. 그리고 마침내 경제적인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치료를 중단하는 방법을 택한다. 결국 여기서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가족들의 의지와 경제력인 것이다. 환자의 자유의지가 아닌, 주변이 처한 상황이 그 생의 연장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을 자유도 역시 결국, 돈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인가.
그리고 이런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병원에서 쫓겨나거나, 퇴원을 결정한다. 가족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 해볼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해봤지만,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이별하는 것밖에는.. 이렇게 인간에게는 죽음조차도 돈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운명이 있는 것이다. 왜 법원은 약물을 적극적으로 투여한 의사에게는 처벌을 내리지만, 돈이 없어서 병원에서 쫓겨나 더이상 치료를 할 수 없게 된 가족들은 처벌하지 않는 것인가? 그들도 결국, 죽음을 방조한 것 아닌가? 어쩔수없이.
결국 법의 심판도, 적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했는가, 아닌가로 판단 되는 것 아닌가. 그사람의 경제적 사정, 형편, 간병 상황 등을 고려해 그것이 부득불한 상황이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를 따지는 것 아니었던가.
결론적으로, 누구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다. 이것이 남아있는 자에게는 나의 개입으로 이 죽음을 막을 수있었던 것인가, 아닌가인가에 따라 고통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자에게는 주변인이 어찌할 수 없었던 상황만이 그 죽음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죽을 자유는 주변인이 개입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죽을 자유는 나의 의지라기 보다, 남아 있는 사람이 그래 "죽을 수 있어" 라고.. "더이상 방법이 없어" 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 때, 가능한 것이다..